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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정보보호 시리즈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 유럽과 한국의 접근 방식 차이

by 250623 2025. 6. 24.

 

한 번 인터넷에 올라간 정보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 상식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에 사생활은 과거보다 훨씬 쉽게 훼손되고, 때로는 과거의 실수나 누군가의 게시물 하나가 개인의 삶 전체를 위협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등장한 개념이 바로 '잊힐 권리(Right to be Forgotten)'다. 이 권리는 더 이상 단순히 기술적 삭제 요청이 아닌, 개인이 자기 정보를 통제하고 사회적 낙인을 제거할 수 있는 디지털 인권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은 GDPR을 통해 이 권리를 법제화하고 실제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마련했으며, 수많은 판례도 존재한다. 반면 한국은 법적으로 잊힐 권리를 명문화하지 않고 있고,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여전히 사회적 합의 부족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번 글에서는 잊힐 권리의 정의, 법적 근거, 실제 적용 방식, 사회적 논의 수준을 유럽과 한국 관점에서 비교해 보고,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디지털 권리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잊힐 권리에 대한 유럽과 한국의 접근 방식 차이점

 

잊힐 권리란 무엇인가? 개념과 등장 배경

잊힐 권리는 개인이 과거의 정보, 특히 온라인상에 저장된 불필요하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삭제할 수 있도록 요청할 권리를 의미한다. 이 권리는 ‘정보의 영속성’이 개인의 사생활과 명예를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디지털 이전 사회에서는 언론 보도나 공공 기록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혔지만, 검색 엔진이 발달한 이후로는 과거가 ‘검색어’로 언제든 소환된다.

이 개념은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CJEU)가 Google Spain 판결을 하며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스페인의 한 남성이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채무 관련 기사가 여전히 검색되자, 구글에 삭제를 요청했고 유럽 법원은 "정보 주체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검색 엔진 사업자에게 해당 링크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바로 잊힐 권리를 현실화한 첫 사례였으며, 이후 GDPR 제17조에 정식으로 반영되어 “삭제 요청권”으로 제도화되었다.

 

유럽: GDPR을 통한 법제화와 실제 작동 방식

유럽연합은 GDPR 제17조를 통해 잊힐 권리를 공식화하였다. 이 조항은 “정보주체는 본인에 관한 개인정보가 불필요해졌거나, 철회되었거나, 불법적으로 처리된 경우, 관련 데이터를 삭제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특히 이 조항은 ‘검색 엔진 사업자’도 책임 주체에 포함시켜, 단순한 콘텐츠 게시자가 아니라 정보 유통 경로 자체에 법적 책임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실제로 유럽 각국에서는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에 삭제 요청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며, 많은 경우에 해당 정보가 검색 결과에서 제거되고 있다. 유럽의 데이터 보호 기관은 해당 요청이 타당한지 여부를 기준으로 △정보의 정확성, △공익성 여부, △정보 주체의 사회적 지위, △정보 노출로 인한 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한다.

 

삭제 요청은 온라인 신청서 또는 국가 데이터 감독기구를 통해 접수할 수 있으며, 거절되었을 경우에는 이의제기를 통해 법적 구제 수단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은 결국 "개인의 자기 정보에 대한 통제권"을 실질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고, 프라이버시의 법적 위상을 명확히 한다.

 

한국: 법적 근거 없는 ‘임시 조치’와 사회적 갈등

반면 한국에는 잊힐 권리에 대한 법적 정의나 조항이 존재하지 않는다. 2016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 자기 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바 있으나, 이는 권고 수준의 비법 지침이며, 강제성이 없다. 일부 포털사이트는 사용자 요청 시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게시글에 한하여 검색 제외나 접근 차단 기능을 제공하고 있지만, 제삼자가 게시한 게시물에 대해서는 사실상 삭제 권한이 없다.

 

또한 한국의 잊힐 권리 논의는 표현의 자유, 알 권리, 언론의 자유와 강하게 충돌하며, 특히 언론계나 법조계에서는 “공익성과 기록보존의 가치”를 이유로 법제화에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유명 정치인의 과거 범죄, 공적 활동, 기업 관련 정보 등을 삭제 요청할 경우, 공공의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는 ‘잊힐 권리’에 대한 요청이 들어와도 대다수 포털이나 플랫폼은 임시 조치(비노출)로만 대응하고, 실제 삭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질적인 프라이버시 보장보다는, 관리의 편의성과 법적 회피가 우선되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사회적 인식과 법적 쟁점 비교

유럽은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를 기본권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으며, 정보 삭제 요청은 단지 기술적 요구가 아니라 헌법적 권리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유럽 사회에서는 잊힐 권리에 대한 저항감이 낮고, 오히려 ‘디지털 복권’이라는 개념으로 수용되고 있다. 과거의 실수나 실형 기록이 계속해서 노출되는 것은 사회적 재통합을 방해한다고 보고, 적절한 삭제는 사회 정의에 부합한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한국은 아직 잊힐 권리를 디지털 권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법제화에 대한 논의는 매번 ‘표현의 자유와 충돌’, ‘사적 감정에 의한 검열 가능성’ 등의 논란으로 중단되며, 그 결과 현재까지도 국가 차원의 삭제 요청 시스템이나 검색 결과 정리 절차가 전무한 상황이다. 특히 구글 등 해외 검색엔진에 대해 실효성 있는 규제를 하지 못하고 있어, 정보 삭제를 원해도 방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법률 차이가 아니라, 프라이버시에 대한 사회적 철학과 시민권 개념의 차이를 반영한다. 유럽은 ‘디지털 공간에서도 권리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전제가 뿌리내려져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인터넷을 ‘정보 유통의 공간’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잊힐 권리는 단지 과거를 지우는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는 행위이며, 자신에 대한 정보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다. 유럽은 이를 GDPR을 통해 법제화하고, 국가가 직접 사용자 편에 서서 기업과 정보 유통 경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법적 정의도 없이 민간 기업의 자율 조치에 기대고 있으며, 표현의 자유 논쟁에 발목 잡혀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더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러나 기술은 ‘기억’을 강화하지만, 사람은 때로 ‘망각’을 필요로 한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개인의 권리는 충돌할 수 있지만,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둘 사이의 합리적인 균형점이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잊힐 권리’라는 새로운 디지털 인권의 개념이 자리해야 한다.